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3 사건/전개 (문단 편집) == 인민 유격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 == || [[파일:귀순자 중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장면.jpg|width=100%]] || [[파일:이덕구 사살.jpg|width=100%]] || || 귀순자 중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장면 || 사살되어 십자가에 내걸린 이덕구의 시신[* 4.3 사건의 피해자인 작가 현기영 쓴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따르면 이덕구의 셔츠 주머니에는 숟가락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토벌대가 빈정거리듯 꽂은 것 같다고.] || 토벌대의 강경한 진압은 1949년 3월, [[유재흥]], 함병선이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2일에 제주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유재흥이 사령관에, 함병선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재흥은 3월 마지막 주에 제주도에 왔으므로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앞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중간산마을과 무장대는 모두 궤멸 상태에 직면해 있었으니 선무공작을 펼쳐도 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유재흥은 피난민 20,000여 명과 무장대 250여 명이 한라산 산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을 하산시킬 작전을 짰다. 그 이전은 함병선이 전투사령부를 이끌었다. 함병선은 "온건 완화 작전을 취하여 오던 국군은 최후적 결의를 갖고 제3단계인 무력소탕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3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의 일대 섬멸전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유재흥은 무력 진압으로 일관하던 진압 방식을 무력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대책이 마련되었고, 산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자진해서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하산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하산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5월까지 수천여 명이 하산했고 여자, 어린이, 노약자 등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검색되어 따로 수용되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직접 돌을 쌓아 격리 구역을 만든 뒤 그 안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유재흥은 재선거가 있던 5월 초까지 부임했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폐지되었다. 서북청년회 일색이었던 제2연대 제3대대와 서청 출신 경찰들도 같이 철수했다. 하지만 하산자 중 1,600여 명은 전국의 교도소에 분산되어 수용되고 말았다. 이후 육군 수색학교의 후신인 독립대대와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가 순서대로 제주도에 들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제주 주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하고, 1949년 7월 7일에는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를 건립했다.[* 정작 이 비석은 [[4.19 혁명]]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런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선무공작 등 일련의 정책들은 무장대를 거의 끝장냈다. 무장대 대원들도 하산 행렬에 따르거나 초토화 작전 도중 사살당했으며, 간부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6월 7일에는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덕구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져 제주경찰서[* 현재의 [[제주 관덕정]]과 제주관아 앞.] 정문 앞에 하루 동안 전시되고 태워졌다. 그의 죽음은 무장대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다. 이후 무장대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지속적인 진압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무장대는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방송국, 파출소를 습걱하는 [[게릴라]]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끝내 군경의 무력 진압과 선무공작으로 인해 '잔비’(殘匪)로 불리며 한라산 일대와 오름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1952년 군 정보국은 무장대의 수를 무장인원 35명, 비무장 동조자 30여명 등 총 65명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런저런 내분 끝에 4.3사건 7주기를 맞은 1954년에는 제주 경찰의 브리핑에서는 무장대의 수가 6명(남성 2명, 여성 2명)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밝혔으며 그 중 여성 한 명이 투항하면서 1955년에는 다시 5명으로 숫자가 줄었다. 1956년에는 이들 중 다시 2명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1957년]]에는 다시 2명이 또 사살되었다. 그렇게 9주기를 하루 앞둔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검거되면서 무장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들은 남녀 각 1명으로 남성대원은 오원권(농민), 여성대원은 한순애였다. 붙잡힌 직후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이미 4.3 사건의 진압 방식도 유재흥이 부임한 후에는 학살보다는 귀순공작 위주로 진행되었고, 경찰 내부에서 4.3에 대한 감정도 누그러졌으며 시간이 흐르며 [[군사분계선]] 이남 일대를 통치하는 세력으로 대한민국의 [[지배]]가 확고해진 상황에서 4.3 사건이 6.25, 이승만의 정치공작 등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사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혔기에 열성 남로당원이 아닌 평범한 양민 출신이었음이 감안되어 전향서를 제출하고 사면되었다고 전해진다.] 무장대의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4.3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4.3 사건의 여파가 간신히 가라앉던 즈음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전국에서는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국에 있던 교도소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이 때 그곳의 4.3 구속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그리고 유족들에 대한 연좌제 적용으로 인해 제주도민들 중 적잖은 민간인이 해병대 등 국군에 자원 입대하는 일도 적잖게 있었다. 자원입대로 충성심을 증명해야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궤멸당한 1950년대 중반에야 제주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1954년 9월 21일 제주 경찰은 경찰국장 [[신상묵]]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해 한라산에 내려졌던 금족령을 해제하였으며, 1957년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며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총성은 멎었다. 여담으로, 씁쓸하지만 학살이 끝난 뒤 몇 년 동안 연속으로 흉작에 시달리던 제주의 그 해 보리 농사[* 제주는 특성상 쌀 농사가 힘들어 대부분은 보리로 주식을 삼았다.]는 대풍이었으며 고등어 어획량도 상당했다고 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제주 4.3 사건, version=697, paragraph=3)] [[분류:제주 4.3 사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